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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에 취한다.

생각정리안되는놈 2019. 10. 1. 23:04

요즘 난 욕에 취해 산다. 틈이 날 때마다 동기들을 만나서 욕을 하며 스트레스를 푼다. 누구 욕을 하냐고? 회사인이 누구를 욕하겠나. 당연 회사지. 회사 시스템 욕, 제작 본부 욕, 1팀 욕, 2팀 욕, 3팀 욕, 4팀 욕. 그냥 눈에 보이는 것은 다 욕한다. 하지만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욕은 후임의 권리니까. 대놓고는 말할 수 없는 후임에게, 후배에게, 약자에게 욕은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 창구다. 하라는 일도 많아 죽을 것 같은데 이것마저 못하게 한다면 좀 너무 하지 않은가? 그리고 뭐 돈이 드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회사돈을 쓰는 것도 아니고 내 시간을 써서 욕하는데 솔직히 회사 사람이 이 글을 봤더라도 너그러이 눈 감고 넘어가주리라 믿는다. 

하지만 변하는 것은 없다. 1시간을, 10시간을 욕해도 그대로다. 그저 욕을 하는 그 순간만큼만 즐거울 뿐이다. 분명 속이 답답해서 실컷 쏟아내었는데 텅빈 공허함이 느껴진다. 허무하다. 심지어 욕을 실컷 퍼부었던 대상에게 미안함까지 느껴진다. 그리고 그 죄책감은 자기 혐오로까지 이어진다.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렇게 욕을 먹어야 했나'. 내가 누군가를 욕하면서 웃는 비열한 인간이었다니...

욕은 술 같다. 혼자 마시는 것보다 같이 마셔야 맛있고, 마실 때만큼은 현실의 고통을 잊을 수 있다. 즐겁다. 한 잔 두 잔 부딪히며 서로의 뒷담에 장단을 맞춰주면 어느새 스트레스는 풀려있다. 이렇게까지만 닮았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욕에도 숙취가 있다. 일명 욕취. (한자에 맞추자면 숙욕이 되어야하지만 뭔가 입에 감기지 않아 욕취라 칭한다. 내 맘ㅎ). 

욕을 하고나서 찾아오는 욕취. 그 공허함과 속쓰림이 싫다. 실컷 욕해봤자 바뀌는 거 하나 없다는 무기력감까지. 요즘 너무 욕에 취해 살았더니 욕취도 거하게 찾아왔다. 숙취와 달리 욕취에는 해장하는 법을 모르겠다.(난 사실 술도 안마셔서 해장도 잘 모름ㅎ). 욕취는 어떻게 해장해야 할까. 그 방법을 고민했다.

그러다 찾은 것이 콘텐츠다. '어떻게 하면 나중에 내가 만들고 싶은 콘텐츠를 만들 수 있을지 방법을 모색해보는 사색의 시간'이 나만의 욕취 해장 방법이다. 아.간.세가 유튜브 본편 홍보를 위해 <채널 나나나>를 만들었다는 충격적인 소식 덕분이었다. 난 아무리 유튜브가 잘나가도 티비는 망할리 없다고, 분명 티비만의 거대 자본을 이용한 '서바이벌'같은 프로는 살아남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검색해보니 이는 안일한 생각이었다. 평균 조회수 200만의 아간세 본편은 티비로 치면 시청률 6-7%나 마찬가지다. 심지어 20-49 타깃 시청률이 말이다. 그리고 명확한 조회수에, 광고 제한까지 없다니. 광고주들이 티비보다 유튜브를 선호할 것은 당연한 치사. 그리고 이미 미국의 경우 티비는 몰락하고 ott가 지배하고 있다. Hbo, amazon, netflix 등등. 넷플릭스만 보고있던 나로써는 충격이었다. 미국 본토에 넷플릭스는 이미 3등 오티티로 밀린지 오래였다. 전세계 방송 프로그램 시상식인 애미상에서도 1등은 hbo. 그리고 그 hbo의 슬로건은 더더욱 충격이었다.

"It's not TV. it's HBO"

그래서 <서바이버>의 메인 피디 마크 버넷에게 이메일을 보내려 한다. 도대체 오디오를 어떻게 수음하느냐고 물어보고 싶다. 분명 바다 한 가운데서 이야기하고 옷은 팬티만 입고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소리를 따냐고. 출연자들이 분명 마이크를 달고 있지 않은데, 웃통도 까고다녀서 마이크를 숨길 데도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수음하냐고. 물어보려 한다. 설마 이정도는 답해주지 않을까. 과거 무한도전이 카메라의 소형화로 리얼 버라이어티를 찍을 수 있었던 것처럼, 분명 촬영 장비의 변화가 콘텐츠를 만드는데 큰 영향을 줄 것이다. 서바이벌 같이 출연자들이 몰입해야하는 프로그램에서는 더욱더.

하튼, 다행히도 욕취 해장법을 찾았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아마 내가 욕을 하던 이유 그 자체가 욕취 해장의 열쇠아니었을까 싶다. 콘텐츠 회사가 아니라 피디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 회사 전반에 대한 욕은 콘텐츠를 만들고 싶은 나의 욕구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 욕구를 채울 생각을 하는 것이 욕취 해장법이 되는 것이다. 만약 회사에서 주는 월급이 적어 회사 욕을 하고 욕취를 느낀다면, 돈을 벌 다른 궁리를 하는 것이 좋은 해장법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욕을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숙취에 고생하고 다신 술을 안먹어야지 다짐하고 그날 바로 술약속을 잡는 술꾼들처럼, 나도 욕은 욕대로하고 그에 맞게 해장하는 건강한(?) 욕생활을 즐길 것이다. 욕을 안하면 답답해 뒤질 것 같으니까. 욕이 얼마나 재밌는데!

욕이 나쁜 게 아니다. 욕취를 제대로 해장하지 못하는 것이 나쁜 거지. 암 그렇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