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하는 정의
내가 생각하는 정의란.
나는 어렸을 적 ‘정의롭게 살아라’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정확히는 교과서보다 만화책에서 먼저 배웠던 것 같다. 지구를 침략하는 악당 프리저에게 맞서 싸우는 손오공은 정의 그 자체였다. 이스트블루 마을을 약탈하는 해적단으로부터 주민들을 지켜내는 루피가 정의였다.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사스케를오로치마루의 유혹에게서 구해내겠다는 마음을 갖는 나루토가 정의였다. 내가 만화책에서 배웠던 정의는 극선(極善)이었다.
극악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극선이 되어야 했다.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자신만의 정의로움을 놓지 않고 지켜나가 결국 악인이 나의 정의로움에 굴복하게 만드는 극선. 극선이 정의라고 배웠다. 학교에서도 비슷하게 배웠다. 무슨 일이 있어도 법과 규칙을 지키고, 도덕 규범을 지키는 것이 정의였다.
하지만 현재는 다르게 생각한다. 정의는 극선이 아니라 극극악이다. 극악보다 더 악이어야 정의다. 정확히 말하면, 극악을 물리칠 수 있는 극극악이 될 수 있어야 정의를 구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손오공은 프리더라는 극악보다 파워 면에서 극극악이 될 수 있었기에 정의를 구현할 수 있었다. 라이어 게임의 주인공 아키야마 또한 만화 내의 극악 <라이어게임국>보다 야비할 수 있었기에 이들을 물리치고 정의를 구현할 수 있었다.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이 정의를 외치는 것은 <멜로스의 대화>에 나온 멜로스인들의 외교적 실수를 되풀이하는 격이다. 그러니 정의만을 주장하기보다 악인이 될 줄 알아야 한다. 악한 짓도 해봐야 남들이 악한 짓을 할 때 막거나 대처할 수 있다. 문방구에서 장난감을 훔쳐 가는 아이들을 잡아내려면 어렸을 적도둑질하려고 시도해봤어야 막을 수 있다.
한 마디로, 악인이 될 줄 모르면서 정의를 외치는 것보다 악인이 될 줄 아는 데도 정의를 외치는 것이 진짜 ‘정의’라는 것이다. 극극악의 능력이 있음에도 악용하지 않을 수 있는 멘탈이야 말로 정의가 아닐까 싶다. 전자의 경우는 정의라기보다 정신 승리에 가깝다고 본다. 생각해보니 손오공, 루피, 나루토가 약간맹한 캐릭터로 나오는 이유가 극극악이 되었음에도 이 능력을 악용하지 못하게 하려는 작가의 의도 때문 아닐까. 만약 베지터에게 극극악의 힘을 줬다면 지구는 바로 멸망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