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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가장 기뻤던 날카테고리 없음 2018. 11. 24. 09:32
-내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날
나는 어디를 가나 항상 특이하다는 말을 들어왔다. 비싼 옷보다 중고샵에서 산 티셔츠를 좋아하고, 남들이 멋있다는 헤어스타일보다 내가 보기에 멋있는 머리를 하고 다녀서 그런 것 같았다. (지금은 머리숱이 없어서 못 하지만) 그냥 질문에 필터링이 없었을 뿐인데 생각도 이상하다고, 좋게 말하면 또라이라했고나쁘게 말하면 사이코패스라고 했다. 나도 그런 평판이 싫지는 않았다. ‘나는 다르다’라는 생각에 나름대로 자부심도 있었다. ‘난 개성 있는 사람이고 천재야’라고 좋게 받아들였다.
그렇게 내 맘대로 살다가 인생에 고비가 찾아왔다. 다니던 kbsN이라는 재방송 채널이 맘에 들지 않아 공중파로 가겠다는 마음에 퇴사했지만 공채에 다 떨어지고, 때마침 15년 동안 키웠던 반려견 또자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또 때마침 좋아하던 내 썸녀랑 망했다. 꿈과 가족과 사랑을 모두 잃은 나는 현실에서도피하고자 2017년 2월 무작정 인도로 떠났다. 인도에 가면 한국에 관련된 모든 것을 잊고 갠지스강을 바라보며 머리가 명쾌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다르게 인도에는 한국인이 득실득실했다. 갠지스강이 있는 바라나시는 별명이 ‘경기도 바라나 시’라고 할 정도로 한국인이 많았다. (신기하게도 외국에 나가면 일본인 중국인 한국인이 딱 구별된다). 인생을 리셋시키고자 머리도 삭발하고 강백호처럼 빨간색으로 염색하고 갔던 나였다. 하필그때 혁오가 유행했고 마침 내 얼굴은 혁오를 닮았다. 심지어 삭발이고, 인도 가서 받은 영감으로 작곡이나 해보자는 생각에 메고 간 기타 때문에 난 바라나시에서 혁오로 유명해지게 됐다.
한국을 잊고자 온 인도였는데 또 한국 사람들이랑 엮이게 됐다. 밤에 옥상에서 기타치고 놀자고 하고, 대마 피는 법 알려준다고 그러는데 거절하기가 그랬다. (펴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어울린 사람들과 얘기해보니 신기하게도 나랑 비슷한 구석들이 많았다. 인도에 오는 사람들이 나 같은 종류의 사람들이어서 그런 걸까. 나처럼 거지 같은 중고샵 티셔츠를 좋아하고, 특이한 머리를 시도해보고, 특히나 여기의 한국 사람들은 문신이 많았다. 난 팔목에 엄마가 보고 ‘판박이냐?’라고 물은 문신 하나 했다고 주변에서 호들갑이었는데 여기 사람들은 몸에 타투가 평균적으로 5~6개는 있었다.
내가 특이해서가 아니라 같은 부류라고 생각돼서 놀자고 불렀던 것이었다. 나는 개성 있다고 생각하고 살아왔었는데 여기서는 딱히 개성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냥 무리 중 한 사람이었다. 여행 작가, 인도에 매년 6개월씩 체류하는 아저씨, 인도에서 실을 사 팔찌를 만들어 한국에서 파는 중졸 18세 등. 나의 자부심이 깨졌다. 그런데 기분이 좋았다. 나에 대한 자괴감보다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었구나 하는 안도감이 더 컸다. 그저 내가 좁은 우물 속에 살았던 거뿐이었다.
반포라는 학원 왕국에서 태어나 고대 기계공학과라는 남자들만 있는 곳에 진학해 공대생들만이 내 주위에 있었다. 미팅이나 동아리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긴 해도 사실 다 비슷비슷했다. 사회적으로 평균 이상인 애들만 보고 살았기 때문에 항상 특이한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그런데 사실 그런 특이한 취급이 무의식적으로 날 괴롭히고 있었다. 겉으로는 항상 ‘내가 개성 있어서 그래’라는 정신승리로 끝났지만 마음속에 의구심이 남아있었다. 내가 이상한 건가, 나는왜 그러지. 그런데 그 의구심이 인도 바라나시에서 풀렸다. 나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랑 비슷한 사람들은 많았다. 내 주위에 없었을 뿐이다. 그리고결국 인도라는 곳에서 만났다. 그때 가장 기뻤던 것 같다. 내 빨간 삭발 머리와 거지 같은 패션, 그리고 손목의 낙서 같은 타투를 보고 ‘멋지다’며 공감해주는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 순간이 바로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 순간이었으니까.
인도를 넘어 태국에 가서도 이런 증명이 이어졌다. 이번엔 한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들까지 증명에 합세했다. 왠지 재밌어 보여서 가게 된 태국 치앙라이 주의 ‘Shambhala Festival’는 히피들의 음악 축제였다. 이 곳은 그야말로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이 있었다. 거지 같은 옷, 특이한 머리, 타투, 언플러그드 음악, 모닥불, 기계가 아닌 사람이 그려 삐뚤빼뚤한 그림, 더러워도 아무 상관 안 하는 히피까지. ‘your gogle is cool’, ‘your head is so nice’. 나를 특이한 사람으로 보지 않는 그들의 칭찬과 시선에 너무 기뻤다. 이번엔 세계적으로 난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 순간이었으니까.
신기하다. 꿈과 가족과 사랑을 잃고 떠난 도피 여행이 내게 가장 기뻤던 순간을 선물해주다니. 인생이란 알 수 없다. 이번에도 또 실패한다면 그땐 어떤 순간이 날 기다리고 있을까. 정말 기대가 되지만 꼭 기다려줄 필요는 없다. 이젠 좋아하는 일 안에서 그 순간을 맞이하고 싶다.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