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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짓말이 싫다.카테고리 없음 2019. 9. 28. 10:50
중학교 2학년 때, 분명 중간고사 성적이 반 4등 안에 들면 또자 동생을 입양한다고 했다. 언제나 혼자인 나의 반려견 또자를 위해 열심히 공부해 반 4등을 이뤄냈다. 당당히 엄마에게 성적표를 들이밀며 "자, 이제 또자 동생 입양하자"라고 말했더니 엄마는 말했다. "저기 있네". 내가 고개를 돌린 곳에는 강아지 인형이 하나 놓여 있었다. 이럴수가. 거짓말이라니. 지금 장난하냐고 했더니 엄마는 강아지 인형을 흔들며 말했다. "멍멍! 으르르르 캉!". 그날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나의 어린이날, 생일 그리고 크리스마스 선물은 다 같았다. '아빠 주 1회만 술 마시기 약속'. 하지만 이 약속은 31살이 된 지금까지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 처음에는 '술 줄이기'였다. 하지만 말만 줄였다고 하지 체감상 줄지 않았다. 그래서 '주 1회'로 명시했다. 그런데 아빠는 분명 어제 먹었는데 오늘 술을 마시며 "이번엔 새로운 1주 시작이니까 괜찮아"라고 말했다. 1주일을 세는 단위가 수요일이라니. 그래서 나온 마지막 약속. '주 1회 수요일만 마시기'. 이건 빼도박도 못하는 약속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자 아빠는 그냥 약속을 어기며 말했다. '다음부터 지킬게'. 물론 그 다음이 언젠지는 아직도 모른다.
때문에 난 거짓말이 싫다. 차라리 아무 말도 안했으면 안했지, 거짓말은 더 싫다. 그래서 난 진심만을 추구한다. 추악한 진심을 말할지언정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상대방의 미움을 받을 지라도 솔직하게 말한다. 거짓말해서 나중에 실망시키는 것보다 차라리 초반에 기분 나쁜 것이 낫다고 생각하니까. 이런 진심은 솔직함이 되고 솔직함은 재미가 되었다. (내가 예전에 쓴 '솔직함이란 워펀맨'이란 글에서도 보듯이 난 솔직한 것 만큼 재밌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덕분에 살아오면서 친구들도 날 좋아했고 소사이어티 게임이라는 서바이벌에 나가서도 추악할지언정 솔직해서 봐줄만하다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이게 다 엄마 아빠의 거짓말 덕분이었다.
회사에서도 나의 솔직함을 이어 나가려 노력했다. 내 꿈의 방송국 tvN에 후회없이 도전하기 위해 면접에서 날 뽑아준 팀장님한테 tvN공채가 뜨면 쓸 거라고 4월부터 말했고, 도시어부 조연출이지만 난 낚시도, 연예인도, 물고기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충성할 것처럼 보이다가 덜컥 붙고 나서 '저 tvN에 붙어 퇴사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것보다 미움 받을 지언정 거짓말하기 싫었으니까. 물론, 만약 이런걸로 미워하는 회사라면 애당초 잘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기도 하다. TvN에 가고 싶은 이유는 단 하나니까. 콘텐츠에 집중하는 회사기에. 그저 보도를 위한 종편 채널 유지를 위해 예능을 만드는 곳이 아니니까. Pd가 콘텐츠에 집중하는 회사에 가고 싶다는게 잘못인가? 그걸 잘못이라 생각하는 회사가 있다면 그 회사가 잘못인 것이다. 하튼, 회사에서도 나는 여전히 진심만을 말하고 다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점점 진심을 빙자한 막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발단은 채널에이 인턴 채용이었다. 공채와 다르게 인턴 채용 경쟁률이 조금 덜하다. 뿐만 아니라, 지금 도시어부에서 일하고 있고 시원 선배님이 면접관으로 들어가니 다른 공채들과는 다르게 확률이 높을 것이라는 나의 판단에서 나와 같이 조연출을 하고 있는 프리랜서 피디님들에게 인턴 채용을 추천했다. 이번이 기회다, 지금이 시원 선배 힘이 가장 강할 때다, 내년에는 이렇게까지 강할 지 알 수 없다 등등. 나의 자소서도 보여주고, A클립를 보여주며 독려했다. 하지만 마감일이 다가올수록 핑계만 대는 프리랜서 피디님들이었다. 1차 시사만 끝나고요, 수정만 하고요, 어차피 학벌 때문에 안되요, 저보다 더 열심히 한 사람이 많을 텐데요 등등. 물론, 바쁘다. 하지만 그럼에도 쓸만한 기회아닌가. 학벌? 그건 못바꾸지 않는가. 그러니 지금 이 절호의 기회에 더 열심히 밤을 새서라도 써야지 않는가. 이런 생각에 난 더더욱 진심을 쏟아냈다. '안되는 게 아니라 안된다고 생각하는 본인들 때문이다.', '유리병에 갇힌 벼룩은 나중에 유리병을 빼도 딱 유리병 만큼밖에 못뛴다, 지금 피디님이 스스로에게 유리병을 씌우고 있는 것이다'. 분명 잔소리 같은 듣기 빡치는 말들이었지만 진심이었기에 난 당당히 말했다. 그럴 때마다 그렇죠, 맞는 말이죠, 알았다, 만을 반복했고 당일에 급하게 부랴부랴 써서 냈고 떨어졌다.
또, 나와 살아온 삶이 다른 영준이에게도 계속해서 진심을 쏟아부었다. '너의 글을 보면 감성팔이 같다. 이 글을 쓰고 실제로 너의 행동이 바뀌었는가', '넌 행동보다 말이 앞서는 거품이다', '맨날 늦는 것은 약속 시간을 지키려는 노력보다 그저 '미안해'라고 말하는게 편해서 하는 이기적인 행동이다' 등등. 감정이 풍부하고 따뜻한 세상을 꿈꾸는 영준이는 따뜻한 거품보다 차가운 진심을 좋아하는 내 입장에서 진심을 쏟아내고 싶은 욕구를 참을 수 없게 만드는 사람이다. 또한 영준이가 착해서 그런거에 화를 내지도 핏대를 세우며 반박하지도 않는다. 그저 '맞다', '듣고보니 형 말이 맞는 것 같애'라며 맞장구 쳐줄 뿐이었다. 그때마다 난 '역시 난 논리적이야'라며 우월감에 도취되었다.
하지만 과연 내 진심에 정말 동의해서 고개를 끄덕였을까. 분명 아닐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것이 분명한 엄마의 잔소리도 듣기 싫은데 생판 만난지 1년도 안된 직장 동료가 잔소리를 해대면 얼마나 듣기 싫을까. 그저 '알았으니 닥쳐줘'라는 뜻의 '알았어'였을 것이다. 도시어부의 시즌이 끝나고 조금 살만해지니까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나는 그저 진실이라는 명분을 이용해 사람들에게 막말을 하며 업무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 있었던 것 같다. 분명 그들을 위해서 하는 소리는 맞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듣는 사람이 기분 나쁘면 그들을 위해서 한 말이 무슨 소용일까. 원웅 선배가 한 말이 떠오른다. '이 세상에 건전한 비판은 없다. 비판은 무조건 기분 나쁘다'.
거짓말이 싫은 것은 진심이 옳아서가 아니었다. 거짓말이 들켰을 때 내가 느낄 실망감을 생각하지 않아서 싫었던 것이다. 엄마 아빠는 나를 생각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나도 똑같다. 프리랜서 피디님들과 영준이 생각을 하지 않고 진심을 빙자한 막말을 퍼부었던 것이었다! 가뜩이나 조연출 업무에 치여 힘들어 죽겠는데 옆에 있는 동료가 잔소리나 해대고 있었으니, 그 말이 진심이든 거짓이든 악담이든 빡치지 않았을까. 다음에 만나게 되면 사과하겠습니다....
나이가 서른이 넘어가면서 맞는 말만 하게 된다. 정확히는 '내가 맞다고 나만 믿고 있는 말'들. 4월 쯤 tvN에 가고 싶어 퇴사한다고 면담했을 때 시원선배가 한 말이 기억난다. '맞는 말만 하면 꼰대라는데, 내가 요즘 그러고 있다'. 나도 점점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맞는 말들을 많이하는 듯 싶다. 상대방을 생각하며 말해야 하는데. 몸은 힘을 잃어가는데 입만 살아나는 30대. 반성한다.
거짓말이 싫다. 하지만, 남을 생각하지 않고 말하는 말은 더 나쁘다...